분석심리학과 종교 (3); 칼 융 분석심리학과 쇼펜하우어, 고통에 대하여

[Abstract]

인간의 고통은 목적지향성이다. 불완전한 인간은 전체성으로 이해되는 자기를 이루는 과정에서 아픔이 생긴다. 이번 글에서는 고통에 초점을 맞춰보자. 쇼펜하우어의 의지-실체는 무엇인가를 꾸준하게 욕망한다. 목적지향적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의지로 인해 고통이 생긴다고 한다.

인간의 고통

이리하여 분석심리학은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그 고통이 어디에서 유래하였는가를 과거의 역사에서 살펴보는 동시에, 아니 그보다도 그 고통이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장차 그를 어디로 이끌어 가기를 촉구하고 있는가 하는 정신의 지향성志向性, 목적성을 알고자 한다.

이부영, 『분석심리학』, 일조각, 2011. p.51.

고통의 목적성, 고통은 왜 그 사람에게 발생하였는가? 그 고통이 원하는 바는 무엇인가?와 같은 고통의 지향성은 대상을 향하기 때문에 인간 마음에서 현상이 되는 것이다. 융은 청소년 시기에 쇼펜하우어를 보고 “그는 처음으로 세계의 고통을 말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2011. 24)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고통을 중심으로

지피티 생성,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Alles, was irgend eines Menschen Herz bewegt hat, und was die menschliche Natur, in irgend einer Lage, aus sich hervortreibt, was irgendwo in einer Menschenbrust wohnt und brütet – ist sein Thema und sein Stoff; wie daneben auch die ganze übrige Natur. Daher kann der Dichter so gut die Wollust, wie die Mystik besingen, Anakreon, oder Angelus Silesius seyn, Tragödien, oder Komödien schreiben, die erhabene, oder die gemeine Gesinnung darstellen, – nach Laune und Beruf. Demnach darf Niemand dem Dichter vorschreiben, daß er edel und erhaben, moralisch, fromm, christlich, oder Dies oder Das seyn soll, noch weniger ihm vor erfen, daß er Dies und nicht jenes sei. Er ist der Spiegel der Menschheit, und bringt ihr was sie fühlt und treibt zum Bewußtseyn.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인간 마음을 격동시키는 그 모든 것, 인간 본성으로 말해지는 즉, 인간 가슴 속 어딘가에, 생육하고 있는 자기 바깥으로 몰아내려고 하는 그 모든 것, 이것이 바로 본성의 일부로 간주되는 주제와 소재이다. 이런 연유로 인해 시인(der Dichter)은 신비를 비롯한, 아나크레온(Anakreon)1, 앙겔루스 실레리우스(Angelus Silesiuys)가 될 수 있는 욕망에 대해 찬미할 수 있으며, 변덕스러움과 사명감으로 말해지는, 공통감각(gemeine Gesinnung)과 숭고함으로 표상되는 비극 또는 희극으로 묘사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그 누구도 시인에게 고상하며 숭고해야하며, 도덕적이고 순결한 기독교인이 되라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와 같이 말할 권리 따위는 없다. 그 시인은 인간다움(인간 본성)의 거울이고 감정과 의식을 추동하여 본성으로 이끄는 것을 뜻한다.

필자 역, Artur Schopenhauer, “Der Welt als Vorstellung zweite Betrachtung”,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1819, §51. 519.

쇼펜하우어는 시인의 예시를 들며 형이상학적인 실체 곧 “의지”2를 말한다. 이 의지는 스스로가 원하는 바를 향하고 있음 자체이기에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에 맞게 세계에 표상이 된다. 세계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것이다. 그런데 이 변덕스러움은 만족과 불만족의 투쟁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변덕스러움이 세계에 투영이 됨에서부터 나온 동물과 인간의 다름을 설명한다.(§16. 201-2) 형이상학적인 실체인 의지는 자연과 인간의 행동을 규명하는 근본됨이다. 하지만 이런 의지-실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이다. 칸트는 물자체를 관념성으로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성에 의한 것이듯, 쇼펜하우어도 세계가 나의 표상이다.(»Die Welt ist meine Vorstellung«; §1. 38-9)라고 언급한 배경에도 이성에 의한 것임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의지의 변덕스러운 지향성은 투쟁의 존재함과 인간 마음 변덕스러움을 반성을 할 수 있는 전제가 된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지향성은 항상 불만족스럽다. 끊임없는 지향함은 만족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이성은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의지를 인식하듯이 자신, 인간 스스로의 의지도 인식하게 한다. 불만족은 고통스러움이고, 세계 전체가 불만족에 의한 것이기에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칼 융의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 고통도 무언가를 목적하고 있다.

Die indische Erzählung von den Prüfungen und der wunderbaren Geduld des Königs Hariscandra: »In Indras Himmel waren einst die Götter und die heiligen Büßer versammelt. Da entstand ein Streit unter ihnen, ob es einen vollkommen tugendhaften Fürsten auf Erden gebe. Vasischtha behauptete, daß sein Schüler Hariscandra ein solcher sei; Siva aber, der in der Gestalt des Visvamitra zugegen war, entgegnete zornig, daß die Tugend dieses Mannes in einer schweren Prüfung nicht bestehen werde. Die Götter geben ihm den Hariscandra preis und Visvamitra geht ans Werk. Er erweist dem König eine Hilfstat, für die er eine ungeheure Summe Geldes verlangt, und Hariscandra verspricht, sie ihm zu zahlen. Weil er sie immer wieder nicht zahlen kann, kommt er mit seiner Gemahlin in tiefstes Elend; beide geraten schließlich in Sklaverei und der König muß den verachtetsten Dienst, den es gibt, die Leichenbestattung besorgen. Aber er nimmt alles auf sich, um seines Versprechens wildenn ,keine höhere Pflicht gibt es für einen Mann, wie die Pflicht zu bewahren das eigene Wort’. Auch er, unterstützt von seiner edlen Gemahlin, besteht die Probe bis zum Schluß, erhält Weib, Kind und Königreich zurück und wird von den Göttern samt seinem Volk in den Himmel erhoben. So wird am Ende, wie die Dichtung sagt, der große Schmerz in die größte Lust verwandelt.« Auftauchen und Ausprägung eines archetypischen Motivs stehen also, wie diese Parallelen veranschaulichen, nicht außerhalb der Historie.

필자 주, 인도 전설 “하리샨드라 왕의 고난과 기적의 인내“에서의 왕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고통을 통해 성장을 한다. (Carl. Gustav. Jung. Symbolik des Geistes, Psychologische Abhandlungen Band 6, 1948(1878), 245-6.)

고통을 자기를 향한 의지로 이겨내는 전설 속 상징을 통해 집단무의식의 대상성을 볼 수가 있고 개인무의식의 의식화를 향한 과정은 자아의 결단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항상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욕망-지향이고 칼 융의 의지는 자기-지향이다. 인간은 전체로서 살 것을 요구받고 있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서 살지 않을 때, 자아가 의식에 집착할 때는 무의식의 대상성이 의식에 포함되려 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2011. 127)

  1. “아나크레온파”, 향락과 쾌락의 기쁨을 찬미한 18세기 중엽의 시인 일파. ↩︎
  2. 이 의지는 칸트의 물자체(Ding-an-sich)에서 가져왔으나 간극이 있다. 물자체는 인간 인식의 한계로서의 실체를 가리킨다. 칸트 인식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으로 말해지는 선험 형식은 감각적 잡다를 직관으로 포착하기 위한 근본조건이다. 이 선험 형식으로 인해 감각적 잡다는 현상(Phenomena)의 원재료가 되는데, 이때, 원재료는 순수이성의 (선험) 범주와 결합이 되어 구체화된다. 즉 구성됨에 따라 표상이 된다. 이에 따라, 선험 형식과 선험 범주는 조건성에서 실재성을 경험적 직관에 의해 획득하게 된다. 이 과정은 순수 이성개념인 순수(선험)직관과 순수(선험)범주를 통한 감성과 지성의 종합에 의한 인식으로부터 이성은 통각작용의 인식의 통일을 통해 “경험적 인식(앎)”을 도출한다. 반면에, 인식으로 규정되지 않는, 다시 말해, 사물이 우리가 지각하거나 말거나 그 자체로 사물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면, 이런 ‘사물 일반’에 대해서는 시공간은 객관적 타당성이 아닌 주관적 조건성에 머무른다.(2010. 147) 칸트의 인식론에서의 순수이성은 주관성과 분리되어 논의가 되었으나 결국은 통각 작용하는 자아, 순수자아로 회귀하게 된다. 칸트가 말하고자한 사물 일반이 곧 물자체이다. 이 물자체는 초월적 관념성을 가지고 있어 의식 속에서의 현상(누메노멘;Noumena)이 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인간 인식으로는 알 수 없는 실체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의지는 스스로가 운동을 하며 변화해간다. 의지는 라틴어 volúntas에서 왔는데 어원적으로도 무엇인가에게로 향함을 말한다. Vol-은 무엇인가를 선택함, 원함이고 -untas는 그것의 속성을 규정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한자어의 意志 또한 개인의 내부적 결단과 그것을 실천하려함을 말하며 능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간극은 물자체의 수동성과 의지의 능동성에 대한 분리됨이다. 바스피(Vasfi. O. Özen)는 쇼펜하우어가 설명하지 않는 이런 모호성을 잘 지적하고 있다. 다음 연구를 참고할 것.(“The Ambiguity in Schopenhauer’s Doctrine of the Thing-In-Itself.” 2020) ↩︎

[참고문헌]

  • Carl. Gustav. Jung. Symbolik des Geistes, Psychologische Abhandlungen Band 6, 1948(1878).
  • Artur Schopenhauer, “Der Welt als Vorstellung zweite Betrachtung”,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1819.
  • Vasfi. Onur. Özen, “The Ambiguity in Schopenhauer’s Doctrine of the Thing-In-Itself.”, The Review of Metaphysics, Philosophy Education Society, 74. 2. 2020.
  • 백종현, 『칸트와 헤겔의 철학』, 아카넷, 2010.
  • 이부영, 『분석심리학』, 일조각, 2011.

댓글 남기기